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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재공>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모암공휘덕인행록(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慕菴公諱徳隣行錄)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慕菴公諱德隣行錄 府君諱德隣字友賢號慕菴趙氏系出玉川即今之淳昌也以高麗大將軍諱璋爲鼻祖屢傳至玉川府院君忠獻公諱元吉號農隱麗季罔僕與圃隱牧隱冶隱諸賢相善時稱五隱副正諱諱瑛號樂齋我太宗朝屢徵以吏判世子師傅不就司正諱龜山郡守諱士淳持平諱溥即府君五世以上也訓導諱希忠司諫諱潤屋號遯世菴參奉諱繼弘敎授諱邦寶即府君高曾祖稱四世也自先世受封于玉川子孫世居仍以爲籍至府君贅居于高敞縣之儉巖里逢壬辰倭亂府君以純孝至行有倜儻大志欲與同志擧義族而老親在無他養者乃負親隱山採蔬拾果以爲養時或登山北望慟哭時李延平貴以長城倅方設募義所府君遂傾家儲輸致諸公欽歎以爲忠孝兩全亂平轉寓于同縣使臣院杜門自廢詩酒自遣每醉必誦武侯出師表澹菴斥和疏長吁短歎至於泣下所居隔仁江水石絶勝府君以江湖散人作烟波釣叟或作蘇子赤壁之遊或和張公白鷺之詩盖其傷時之志遯世之趣知之者鮮矣甞築精舍訓誨後進至今遣址尚稱書堂洞又建三賢影堂于仁江上盖三賢端廟遜位後先祖承旨公與申公末舟張公肇平解官歸鄉者也朝廷甞擧遣逸特除府君 慶其殿參奉不就光海朝彛倫斁絶時同省内友人金克成持平李垓生員者和附時議陳廢母疏要府君同叅府君正辭峻靑即爲絶交時禍色滔天上下凛二人皆爲府君甚危而府君毅然不撓處之晏如也府君生于嘉靖甲子卒于萬曆己未十月二十日享年五十六墓高敞仁江上癸坐阡配端人昌寧曺氏憲女直提學庶後孫墓用魯衛禮生二男長涵通德郎次將仕郎女適李元金致道孫相弼相元女適康麟長房出相夏時雄相説女適金起南季房出曾玄以下煩不盡錄嗚呼兵燹屢經遣橋失亡雲仍零替墓無顯刻府君之潛德懿行殆將湮沒而聞不肖齋恨久矣玆敢不揆畧叙其志行梗槩之所其傳聞於家鄉者隨以姓系子孫第錄如右以竣立言君子之裁擇而發揮焉 玄孫 垕東 謹述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모암공휘덕인행록(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慕菴公諱徳隣行錄) 府君의 諱는 德隣이오 字는 友賢이며 號는 慕菴이다. 趙氏는 玉川에서 系出하니 곧 지금은 淳昌郡이다. 高麗 大將軍 諱 璋을 鼻祖로 하여 屢傳해서 玉川府院君 忠獻公 諱元吉 號 農隱에 이르러 麗末에 不臣하고 圃隱·牧隱·冶隱 諸賢으로 더불어 서로 친하니 당시 五隱으로 稱했다. 副正 諱 瑛은 號가 樂齋니 我太宗朝에 吏判世子師傅로 여러 번 불렀으나 不就하고 司正 諱 龜山 郡守 諱 士淳 持平 諱 溥는 府君의 五世이상이고 訓導 諱 希忠 司諫 諱 潤屋 號 遯世菴 參奉 諱 繼弘 敎授 諱 邦寶는 府君의 고조 증조 조부 아버지 四世이다. 先世로부터 玉川에 封함을 받아 자손이 世居하므로서 因해 貫籍을 하고 府君에 이르러 비로소 高敞縣 儉巖里에 처가살이 왔는데 壬辰倭亂을 만나 府君이 순실한 孝와 지극한 行誼에다 동출한 큰 뜻이 있어 同志와 함께 義兵을 일으키려 했으나 老親이 계시고 딴 奉養할 사람이 없어서 어버이를 업고 산으로 들어가 숨어 나물 캐고 과일 주워 봉양을 하며 때론 혹 산에 올라 북쪽을 향해 통곡을 했다. 그때 李延平 貴가 長城원으로 幕義所를 설치할세 府君이 이에 家產을 기울여 보내주니 諸公들이 欽歎하여 忠과 孝를 둘다 온전히 했다고 하였다. 亂이 平定됨에 同縣 使臣院으로 移居하여 門을 걸고 스스로 功名을 버리고서 詩와 술로 세월을 보냈으니 매양 醉하면 반드시 諸葛武侯의 出師表와 胡澹菴 斥和疏를 외며 長歎息을 하다가 울기까지 했다. 사는 곳이 仁川江을 隔하여 水石이 絶勝할새 府君이 江湖散人으로 아지랑이 낀 물결에 낚시질 하는 늙은이가 되어 혹은 蘇子(蘇軾)의 赤壁江 놀음을 하고 혹은 張公(張志和) 白鷺의 詩에 和答하니 시절을 哀傷히 여기고 세상을 숨어 사는 志趣를 아는이 적 었다. 일찌기 精舍를 지어 後進을 가르쳤으니 지금도 遣址를 書堂洞이라 稱하고 또 三賢의 影堂을 仁川江 위에 세웠으니 三賢이란 端宗이 遜位한 뒤 先祖 承旨公과 申公 末舟 張公 肇平이 벼슬을 버리고 歸鄉한 분들이다. 朝廷에서 일찌기 遣逸을 천거 할 때 府君을 慶基殿參奉으로 특별히 제수하였으나 不就했고 光海朝 倫綱이 杜絶될 때 한 고을 안의 벗 金克成(持平)과 李垓(生員)란 者가 時議가 附和하여 廢母疏를 올리면서 府君에게 同叅하기를 원할새 府君이 바른말로 준절히 나무라고 바로 絶交하니 禍色이 衝天하고 上下가 위태한 때라 사람들이 모두 府君을 위해 심히 위태롭게 여겼으나 府君은 毅然히 흔들리지 아니 하고 편안한듯이 處했다. 府君이 嘉靖 甲子(明宗 十九年) 태어나 萬曆 己未 十月 二十日에 卒하니 享年이 五十六이고 墓는 高敞 仁川江 위 癸坐의 둔덕에 있다. 配 端人 昌寧曺氏는 憲의 따님으로 直提學 庶의 後孫이고 墓는 魯나라 衛나라의 禮로 모셨다. (祔墓) 二男을 두니 長은 涵으로 通德郎이고, 次는 淑으로 將仕郎이며 女는 李元 金致道에게 출가했다. 孫 相弼 相元과 康麟에게 출가한 딸은 長房 所生이고 相夏 時雄 相説과 金起南에게 출가한 딸은 季房 所生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번거러워 다 기록하지 않는다. 嗚呼라. 兵亂이 여러 번 지남에 遺稿가 亡失되고 雲仍이 零替하여 墓에 나타나게 刻한 것이 없으니 府君의 숨은 德과 아름다운 行誼가 장차 泯滅하여 듣지 못하게 될세, 不肖가 恨을 지닌지 오래라. 이에 敢히 참람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가정에서 향당에서 함께 전해 들은 바 그 분의 志行의 梗槩를 대충 적고 곁들여 姓系와 子孫을 위와 같이 차례로 적어 立言君子의 취사선택 하여 發揮해 쓰기를 기다린다. 玄孫 垕東 謹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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